수제맥주집에서 사람들이 주눅 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집은 그걸 OX 문제 하나로 풀어놨다.
식당을 나와 일단 정비를 위해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잠시 뻗었다. 아침 8시 40분 버스로 시작해 로프웨이, 묘반, 지옥 일곱 곳까지 강행군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잠시 쉬면서 오늘의 전리품인 일곱 칸짜리 스탬프 종이도 고이 모셔두고, 급하게 처리할 업무는 없나 확인했다. 다행히 오늘은 조용한 날이었다. 아마도 관광객 모드로 변신한 나를 하루쯤 쉬라고 배려해 주는 것 같았다.
잠시 에너지를 충전하니 오늘의 최종 목적지로 나설 상태가 되었다. 바로 어젯밤 퇴근길에 라스트오더 시간에 밀려 놓쳤던 벳부 브루어리다.
브루어리(brewery)는 맥주를 직접 빚는 양조장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빚은 자리에서 바로 따라 파는 곳을 브루펍이라 부르는데, 이 집이 그렇다. 벳부역 바로 앞 에키마에초(駅前町)에 있고, 2022년 12월에 문을 연 벳부 최초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라고 한다.
가기 전에 이 집에 대해 조금 읽어보다가 멈칫했다. 내건 컨셉이 「旅を潤す」 — 여행을 적신다 — 이고, 그 지침으로 삼았다고 적어둔 사람이 아부라야 구마하치다. 어제 호텔 로비에서 보고 오늘 아침 산 위에서도 떠올렸던 그 구마하치다. 다이쇼에서 쇼와로 넘어가던 시절, 벳부 번화가에는 비어홀과 비어스탠드가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 황금기를 크래프트 맥주로 되살려 보겠다는 것이 이 집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백 년 전 한 사람이 만들어 둔 흐름이 백 년 뒤 맥주집의 창업 이념이 되어 있었다.
가는 길 모퉁이에 입간판이 하나 서 있었다. 「아비림픽 오이타 2026」, 제26회 오이타현 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이틀 뒤인 10월 3일 토요일에 폴리테크센터 오이타에서 열린다고 적혀 있었다. 종목은 워드프로세서, 오피스 어시스턴트, 표 계산, 빌딩 클리닝, 제품 패킹, 찻집 서비스, 사진 촬영. 입장 무료에 누구나 자유롭게 견학할 수 있다고 했다.


매장에 들어서 혼자라고 하니 바 자리로 안내해 준다. 메뉴판을 보니 참 재미있다. OX 문제로 자신의 취향을 하나씩 골라 가면서 자기한테 맞는 맥주에 도착하게 하는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차트는 「오늘 마실 맥주를 알 수 있다」로 시작한다. 쓴 것이 좋은지, 과일 느낌을 원하는지, 왕도를 마시고 싶은지. 예와 아니오를 서너 번 따라가면 한 병 앞에 도착한다.
수제맥주를 파는 곳에 가면 정말 다양한 맥주들 때문에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특히 수제맥주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더더욱 그래서 살짝 주눅이 들기도 한다. 메뉴판에 적힌 「웨스트코스트 IPA 7.0%」 같은 말은 아는 사람에게만 정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벽이다. 그런데 이 집은 그 벽을 맥주 지식의 문제에서 취향 질문의 문제로 바꿔놓았다. 쓴 것을 좋아하는지, 과일 향이 좋은지는 누구나 대답할 수 있다. 이런 재미있는 게임처럼 맥주를 고를 수 있게 한 아이디어가 참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리 점찍어둔 3잔 샘플러를 주문했다. 작고 귀여운 잔에 세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게 해두는 메뉴다.

드디어 맥주가 나왔다. 이 세 잔은 도수가 비슷하기에 어떤 것을 먼저 마셔도 괜찮다. 조금씩 맛을 본 이후에 한 잔 한 잔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기본은 하는 맛이었다.
바에 있는 직원들이 말이라도 걸어주려나 싶었는데 그냥 다들 서 있기만 했다. 그렇게 다정한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둘러보면서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하니 금방 모든 잔이 비워졌다. 한 잔에 150밀리리터니까 세 잔을 합쳐도 파인트 한 잔이 안 된다.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면 유리 너머로 양조 설비가 보인다. 브루펍이라 그렇다. 지금 내 앞의 잔에 든 것이 저 탱크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다음은 도수가 조금 높은 IPA 두 종과 라거 한 종을 주문하기로 했다. IPA는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의 줄임말로, 홉을 많이 넣어 향과 쓴맛을 끌어올린 맥주라고 한다. 그래서 브루어리마다의 독특한 제조법이 이 술의 맛을 좌우한다.

새로 주문한 술이 준비되는 사이 병으로 파는 맥주들을 살펴보았다. 이 집이 특별한 점은 맥주 이름이 전부 이 도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유아가리 필스(湯あがりピルス)는 탕에서 나와 마시는 맥주, 유케무리 헤이즈(湯けむりヘイズ)는 온천 수증기, 가보스 세종은 오이타 특산 감귤. 오늘 내가 돌고 온 지옥에서 온 것도 있다. 오니IPA는 지옥순례의 아이콘인 오니(鬼)에서, 라피스 블루는 바다지옥에서 따왔다고 한다. 붉은 벵가라레드는 지옥이 아니라 봄에 산을 태우는 오기야마 불축제에서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집은 지옥 하나만 가져다 쓴 게 아니다. 온천과 수증기와 감귤과 불축제와 지옥을, 그러니까 오늘 하루 내가 버스를 타고 돌아본 것 전부를 병에다 하나씩 나눠 담아 놓은 셈이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꼭 몇 병은 사서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오니 새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 잔 한 잔 음미하며 마신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술을 줄여서인지 요즘은 조금만 마셔도 취기가 오른다. 알코올로는 정말 가성비 좋은 인간이 된 것이다. 조금만 마셔도 알딸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세 잔 모두 개성 있는 맛이었다. 그중 한 잔을 따로 큰 잔에 시켜 마셔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곧 마감할 시간도 되어가고 잔도 비워지고 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브루어리를 나선다.

나오면서 생각한 것은 맥주 맛이 아니라 저 차트였다. 좋은 것을 많이 갖춰두는 일과, 그중에서 내 것을 고르게 해주는 일은 아주 다른 문제다. 앞쪽은 만드는 사람의 일이고 뒤쪽은 파는 사람의 일인데, 뒤쪽을 포기하고 손님에게 떠넘기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 오늘 낮에는 종이 한 장이 사람을 끌고 다니는 것을 봤고, 밤에는 종이 한 장이 사람의 주눅을 덜어주는 것을 봤다. 둘 다 벳부에서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