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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살이 벳부

4일차 · 10/1 목 · 지옥 · 7편 중 4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Leave before you miss home.

쓸모없던 땅의 무서운 이름을 아무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빈칸 일곱 개를 쥐여준다.

들어갈 수 없는 온천

묘반에서 버스를 타고 간나와로 내려왔다. 이제 지옥이다. 벳부 지옥순례(地獄めぐり)는 이 일대에 흩어진 일곱 곳을 묶어 도는 코스인데, 온천이라고는 해도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물이 100도 가까이 끓고 성분도 독해서 몸을 담글 수가 없다. 여기서는 보는 온천이다. 아침에 산 위에서 “저 김 오르는 자리들”이라고 불렀던 곳 중에, 가장 뜨겁고 가장 험한 일곱 군데라고 보면 된다.

일곱 곳

13:36 — 아침에 산 간식. 버스를 기다리며
13:36 — 아침에 산 간식. 버스를 기다리며
13:58 — 바다지옥 입구
13:58 — 바다지옥 입구
14:00 — 한 곳 500엔, 일곱 곳 공통권 2,400엔
14:00 — 한 곳 500엔, 일곱 곳 공통권 2,400엔

사실은 너무나 힘들었다. 일곱 곳을 다 다닌다고 생각하니까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묘반에서 이미 반나절을 썼고 몸은 탕에 다녀와 나른했다.

그런데 매표소 앞에서 계산이 섰다. 한 곳이 500엔, 일곱 곳 묶음이 2,400엔. 다섯 곳만 가도 본전이다. 그 앞에서 공통권을 샀다. 이때는 이게 하루를 끝까지 끌고 갈 줄 몰랐다.

처음 간 곳이 제일 좋았다

14:02 — 국지정 명승 海地獄
14:02 — 국지정 명승 海地獄
14:04 — 코발트블루
14:04 — 코발트블루
14:04 —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처음 들어간 곳은 바다지옥이었다. 온천수에 녹은 철 성분 때문에 물이 코발트블루로 보인다는데,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진했다. 못 둘레로 정원이 있어서 걷는 맛도 있었다.

일곱 곳 중에 하나만 꼽는다면, 글쎄, 이것저것 다 다녀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첫 번째인가 두 번째 갔던 그런 지옥이 그나마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좀 조용히 살펴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14:17 — 못 건너편에는 커다란 연잎
14:17 — 못 건너편에는 커다란 연잎

나머지 지옥들은 되게 사람도 많고 생각보다 크지도 않아서, 야 이렇게 억지로 일곱 개를 다 채워갈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래부터 지옥이었다

일곱 곳. 색도 성질도 다 다르다
일곱 곳. 색도 성질도 다 다르다

다니다가 궁금해졌다. 원래도 이 지역 지명이 지옥이었을까, 아니면 온천 상품으로 개발하면서 지옥이라고 이름을 붙인 걸까.

찾아보니 원래부터 지옥이었다. 천 년도 더 전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땅에서 열탕과 유황 연기가 솟구쳐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땅이었다. 농사도 못 짓고 집도 못 짓는, 쓸모없는 땅. 불교의 지옥 그림과 똑같아 보였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다.

보통은 관광지로 만들 때 이름부터 순화한다. 그런데 여기는 이미 있던 그 무서운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간판으로 올렸다. 가장 큰 약점을 그대로 간판으로 세운 셈이다.

14:52 — 오니야마지고쿠는 악어를 키운다
14:52 — 오니야마지고쿠는 악어를 키운다

쓸모없다던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오니야마지고쿠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여기 수증기의 압력은 열차를 한 칸 반 정도 끌 수 있는 힘이고, 그 열을 이용해 악어를 기르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만든다고. 사람이 못 들어가던 땅에서 악어가 산다.

14:38 — 마시는 온천. 80도
14:38 — 마시는 온천. 80도
15:06 — 통나무에 빼곡히 박힌 동전
15:06 — 통나무에 빼곡히 박힌 동전

빈칸이 나를 끌고 갔다

14:18 — 스탬프 책자
14:18 — 스탬프 책자

그리고 일곱 곳을 묶어 공통권으로 팔고, 입구에서 스탬프 책자를 쥐여준다. 하나만 보면 20분이면 끝날 구경을, 일곱 개를 모으는 일로 바꿔놓은 것이다.

15:25 — 피의 못 지옥
15:25 — 피의 못 지옥

마지막 두 곳은 2킬로쯤 떨어져 있어서 걸어갈 각오를 했는데, 마침 버스가 와서 편하게 버스를 타고 한 5분 10분 만에 이동했다.

15:52 — 간헐천 앞에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린다
15:52 — 간헐천 앞에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린다

마지막은 다쓰마키지고쿠, 간헐천이다. 사람들이 돌담 앞 계단에 줄줄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쉬는 시간이 30~40분, 뿜는 시간이 6~10분이라고 한다. 물 온도는 105도, 하루에 600킬로리터가 솟는다.

옐로스톤이나 아이슬란드의 간헐천이 더 유명하지만, 여기가 사람을 모으는 이유는 주기가 짧아서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30분만 앉아 있으면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설계다.

15:50 — 돌 틈에서 수증기가 솟는다
15:56 — 칸이 다 찼다
15:56 — 칸이 다 찼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다 봐야 될까 생각하다가도, 공통권을 끊게 됐고 스탬프를 찍다 보니까 마지막까지 다 찍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결국 완주를 했다.

걸린 줄 알면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정리를 해봤다. 아무도 쓸 수 없던 땅이 있었다. 이름은 이미 ‘지옥’이었고, 그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일곱 곳을 하나로 묶어 공통권을 만들고, 그 안에 빈칸 일곱 개를 넣은 책자를 끼워 넣었다.

못난 땅을 이름도 바꾸지 않고 간판으로 세우고,
일곱 개를 묶어 빈칸으로 만들어 두는 것.
마케팅 관점에서는 정말 멋진 사례다.

그 장치에 내가 정확히 걸렸다.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대면서도 마지막 칸을 채우러 갔으니까. 재미있는 건 걸린 줄 알면서 걸렸다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이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선택’을 ‘비워두면 찝찝한 빈칸’으로 바꿔놓는다는 걸 알면서도, 손은 스탬프를 찍고 있었다.

오늘 하루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유황온천에 몸 담그고 있던 그 시간이다. 그런데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종이 한 장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