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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살이 벳부

4일차 · 10/1 목 · 묘반 · 7편 중 3

200미터 위에 탕이 있다

Leave before you miss home.

단체는 입구에서 돌아간다. 200미터를 더 올라가면 아무도 없는 유황 노천탕이 있었다.

묘반으로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갈아탄다. 시간이 맞으면 오늘은 묘반에서 묘한 온천을 경험해 보려고 했다. 일반 단순천하고는 다르다고 하니까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묘반(明礬)은 시내에서 산 쪽으로 20분쯤 올라간 해발 400미터 언저리의 작은 마을인데, 시내 시영탕 물이 성분 옅고 자극 적은 단순천이라면 여기는 유황천에 산성이라 뿌옇고 냄새가 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300년 된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300미터를 덜 올라갔다

11:56 — 묘반 정류장
11:56 — 묘반 정류장

묘반은 처음에 내렸을 때 버스 정류장을 너무 아래쪽에서 내려서 실제로 너무 헤맸다. 실제로는 한 300, 400미터를 더 올라가야만 유노하나를 만드는 그곳도 볼 수 있고, 거기 대중 온천도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좀 걸렸지만 주변 경치들을 보면서 도착했다.

12:03 — 길가 풀숲에서 그냥 김이 올라온다
12:03 — 길가 풀숲에서 그냥 김이 올라온다

올라가는 내내 땅에서 김이 샜다. 담벼락 밑에서도, 길가 풀숲에서도.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김 오르는 자리”라고 불렀던 그곳에 지금 서 있는 것이다.

명반을 만들던 마을

12:01 — 짚 지붕들이 밭처럼 늘어서 있다
12:01 — 짚 지붕들이 밭처럼 늘어서 있다

언덕을 올라서자 짚 지붕들이 밭처럼 늘어선 자리가 나왔다. 집도 아니고 창고도 아닌 것이 비탈을 따라 줄줄이 엎드려 있다.

이 마을 이름이 왜 묘반(明礬)인지 거기서 알았다. 명반이라는 광물에서 온 이름이다. 1725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때 이 지역이 막부에 바칠 명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명반은 약에도 쓰고 천을 염색할 때도 쓰고 가죽을 무두질할 때도 쓰고, 화약에도 들어가던 물건이다.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명반의 90퍼센트 이상이 이 비탈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는 원래 온천 마을이 아니라 산업 지대였다. 아무도 살 수 없는 유황 증기 구멍 위에, 사람들이 지붕을 얹어 쓸 것을 받아내던 자리다.

온천의 꽃

12:18 — 짚 지붕 아래에서 생기는 것
12:18 — 짚 지붕 아래에서 생기는 것

지금 그 지붕 아래에서 받아내는 것이 유노하나(湯の花)다. 유(湯)가 온천이고 노(の)가 ‘의’, 하나(花)가 꽃이니 온천의 꽃이다. 온천 증기가 식으면서 생기는 유황 결정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걸 받아내는 오두막이 유노하나고야다.

만드는 방식이 재미있다. 증기가 올라오는 땅에 먼저 굵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푸른 점토를 덮는다. 그리고 짚으로 지붕을 얹어 열을 천천히 빠져나가게 둔다. 그러면 그 아래에서 몇 달에 걸쳐 결정이 하얗게 핀다.

12:17 — 오두막 바닥에 서리처럼 깔린 것
12:17 — 오두막 바닥에 서리처럼 깔린 것

실제로 들어가 보니 바닥 전체에 서리가 내린 것 같았다. 왜 이걸 꽃이라고 불렀는지 바로 알겠다.

12:18 — SINCE 1725
12:18 — SINCE 1725

이 방식이 300년 넘게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제조 기술은 국가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저 오두막들이 늘어선 풍경은 국가 중요문화적경관으로 지정돼 있다. 기술도 문화재이고, 그 기술이 만들어낸 풍경도 문화재인 것이다.

어제는 구마하치를 봤다. 한 사람이 기획해서 벳부를 세상에 알린 이야기였다. 오늘 본 것은 마을 전체가 수백 년에 걸쳐 만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되게 다른 방식으로 벳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이야기라 너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이걸 그대로 유지하면서 만들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벳부의 온천을 이렇게 전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200미터

12:23 — 大露天風呂 ← 왼쪽으로 곧장 200m
12:23 — 大露天風呂 ← 왼쪽으로 곧장 200m

유노하나고야를 둘러보고 나오니 표지가 하나 서 있었다. 대노천탕, 왼쪽으로 200미터.

12:25 — 10:00~20:00, 어른 800엔
12:25 — 10:00~20:00, 어른 800엔

시내 탕이 250엔이었으니 세 배가 넘는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다. 가까이 가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 왔다.

도착하자마자 정말 특이한 향기가 나니까, 아 이곳이 정말 다른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43 — 노천 바위탕. 아무도 없다
12:43 — 노천 바위탕. 아무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바위로 두른 큰 탕에 유백색 물이 가득 차 있고, 김이 나무 울타리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탕에 몸을 담갔는데 노천탕이다 보니까 상당히 오래 있을 수 있었다. 앉아 있으면서 아 좋다 하면서 경치도 보고, 물속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물 냄새도 좀 맡아보고. 나와서 헹구고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되게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계속 움직이다가
잠시 내 의지로 시간을 정지시킨 시간 같은 느낌이었다.
12:47 — 씻지 않고 나왔다
12:47 — 씻지 않고 나왔다

나올 때는 물로 헹구지 않았다. 유황 성분을 몸에 남겨두는 게 효과라고 한다. 덕분에 그날 하루 종일 유황 냄새를 데리고 다녔다.

200미터가 가른 것

실제로 묘반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되게 많았다. 한국 관광객도 정말 많았다. 그 사람들은 우르르 와가지고, 온천물에 손을 담글 수 있게 해둔 데에 잠깐 담그고, 단체로 나눠주는 온천 증기로 찐 달걀하고 사이다 하나씩 먹고 돌아가더라.

12:10 — 증기로 찌는 상자
12:10 — 증기로 찌는 상자
12:19 — 찐 달걀과 사이다
12:19 — 찐 달걀과 사이다

200미터만 더 가면, 그리고 20분만 더 있으면 이렇게 멋진 온천욕을 할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못 하는 거잖은가. 몰라서가 아니다. 일정이 사람을 끌고 가니까 그렇다. 버스가 기다리고 다음 코스가 정해져 있으면, 200미터는 갈 수 없는 거리가 된다.

나는 할 수 있었고, 그 부분에 있어서 내가 더 깊이 있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산에서 떠올린 넓이와 깊이가 여기서 눈앞에 그려진 셈이다. 저 200미터가 그 둘을 가르는 거리였다.

이렇게 바삐 살면서 내 삶의 넓이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내 스스로 내 의지를 가지고 시간을 정지시켜서
그 시간의 깊이를 더해 보는 것도 상당히 좋은 시간인 것 같다.

벳부를 스물세 개로 나눠 담았다

13:05 — 약용 입욕제 ‘유노하나’
13:05 — 약용 입욕제 ‘유노하나’

나오는 길에 그 유노하나를 입욕제로 만들어 파는 것을 샀다. 11개도 팔고 22개도 팔고 33개도 팔고 이렇더라. 22개를 샀다. 여기에 티켓을 끊을 때 받은 교환권으로 한 개를 더 받았으니 23개가 됐다.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 하나씩 주면서, 정말 피곤할 때 욕조에 풀어가지고 여기 벳부에 있는 유황온천에 왔다 생각하고 피로를 한번 풀어라, 라고 선물로 주면 좋겠다. 선물도 좋지만 내가 벳부가 생각날 때 집에 있는 욕조에 풀어놓고 온천욕을 즐기는 수단으로 써도 되겠고.

생각해 보면 300년 전부터 그러라고 만든 물건이다. 여기까지 올 수 없는 사람에게 이 물을 보내는 것. 한 봉지가 욕조 하나 분량이니, 서울 욕실에서 그 냄새가 올라오는 순간 이 비탈이 잠깐 돌아오는 셈이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받게 될지 궁금하다.

같은 달걀

13:08 — 표를 받던 어르신과
13:08 — 표를 받던 어르신과

거기 입구에서 표를 받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분하고 잠깐 얘기도 하고, 목욕 너무 멋있었다고 너무 좋았다고 이렇게 얘기했다. 그리고 유노하나를 산 다음에 사진 같이 찍어도 되냐고 여쭤보니까 웃으시면서 함께 사진도 찍어주셨다. 아침에 아는 사람들의 행복을 빌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모르는 분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13:15 — 온천 달걀과 지고쿠무시 푸딩
13:15 — 온천 달걀과 지고쿠무시 푸딩

내려오는 길에 달걀 하나랑 푸딩 하나를 먹었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잘 먹었던 것 같다.

아까 단체 관광객들이 먹고 돌아가던 바로 그 달걀이다. 같은 땅의 증기로 찐, 같은 값의 달걀. 다만 나는 그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먹었다. 달걀 맛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내 쪽이다.